3D 프린팅, 유리공예 새 길 열었다
액체 상태에서 곧바로 고체 유리 제품으로 맞춤식 유리병 음료자판기 등 쓰임새 다양
지금 우리가 쓰는 투명한 유리의 역사는 약 4500년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500년께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후 로마시대에 긴 대롱에 유리 용액을 묻힌 뒤, 반대편 끝에서 입김을 불어 다양한 유리 제품들을 만드는 대롱불기법이 등장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대형 판유리 제조법이 등장하기 전까진 대롱불기법이 유리제품을 만드는 주요한 공법이었다.
MIT 연구진이 수천년 유리 제조법 역사에서 또 하나의 획을 그을 만한 새로운 기술을 최근 선보였다. 요즘 각광을 받는 3D 프린팅을 활용해 투명유리 제품을 만들어낸 것. MIT의 미디어랩, 기계공학부문, 글래스랩 등이 함께 진행한 이번 프로젝트의 이름은 ‘G3DP’이다. 이들은 기존과 달리, 3D 프린팅을 이용해 별도의 냉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액체 상태에서 곧바로 고체 유리제품을 만들어냈다. 3D 프린터가 노즐을 통해 황금색 유리물을 배출하면서 즉석에서 다양한 유리제품을 뽑아내는 장면은 유리공예 장인들의 현란한 기술을 보는 것만큼이나 경탄을 자아낼 만하다. 이젠 숙련된 장인이 아니더라도, 컴퓨터의 힘을 빌려 수준 높은 유리공예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특히 층을 쌓아 올리는 방식은, 기존의 대롱 불기 방식에서는 구현하기 곤란한 다양한 형태의 굴곡면을 만들어냄으로써 새로운 조형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유리작품 만드는 방법 자체는 아주 간단하다. 유리재료를 가열해 용액으로 만든 뒤, 이를 노즐로 통과시켜 원하는 모양의 제품을 만들어 식히면 된다. 다만 3단계 공정별로 별도의 가열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돼 있다. 우선 프린터 윗부분은 작은 가마 역할을 한다. 여기에 유리 재료를 여기에 놓고 섭씨 1000도 이상으로 가열해 유리물을 만든다. 가마 아래에는 노즐이 달려 있다. 이 노즐에도 가열 코일이 부착돼 있어 유리가 노즐을 통과하는 동안 액체 상태를 유지시켜준다. 이렇게 해야 유리가 노즐 안에 달라붙지 않는다. 마지막 세번째는 프린터 하부의 출력방이다. 이 곳에선 노즐을 통과한 유리용액이 서서히 굳도록 적절한 온도(480도)를 유지해준다. 그렇게 해야 유리에 균열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MIT 글래스랩 책임자인 피터 호크(Peter Houk)에 따르면, 관건은 유리를 프린트하는 데 적합한 노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높은 온도에 견디면서 유리가 달라붙지 않는 물질을 찾아야 했다. 몇몇 유리 공장에서 사용하는 백금 노즐을 사용하면 되지만, 이는 값이 너무 비싸다는 게 흠이었다. 연구진은 궁리 끝에 원하는 성질을 모두 갖고 있는 산화알루미늄으로 노즐을 주문제작해 부착했다.
이번 유리 3D 프린터에 사용한 유리는 소다석회 유리다. 오늘날 음료병에서 창문에 이르기까지 일상 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유리이다. 밀폐용기에 쓰이는 파이렉스 같은 특수유리는 이보다 훨씬 더 높은 온도가 필요하지만, 그것 역시 원칙적으론 3D 프린팅 방식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의 유리 제조법이 실용화하려면 넘어야 할 벽들이 제법 있다. 무엇보다 지금으로선 유리 제품을 만드는 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 우선 유리물을 만드는 데만도 무려 4시간이 필요하다. 그 이후에도 유리 표면의 공기방울이나 불순물 등을 없애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이는 개발 노하우가 쌓이면서 점차 해결돼 갈 것이다.
연구진은 “예술가들이나 제품 설계자들이 새로운 유리가공법을 충분히 터득하게 되면 지금까지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응용 분야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연구진은 그 후보 중 하나로 데이터 손실이나 왜곡 없이 정보를 전달해주는 광섬유를 꼽았다. 단순한 케이블이 아닌 다양한 모양의 광섬유를 제작할 수 있게 되면 그만큼 다양한 제품의 등장이 가능해진다. 외관을 유리로 3D 프린팅한 새로운 형태의 건축물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유리 3D 프린팅을 이용해 태양 에너지를 수집하고 저장하는 데 최적의 건물 외관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일상적인 쓰임새에서도 여러 상상이 가능하다. 예컨대 3D 프린터를 내장한 음료판매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판매기는 취향에 맞춰 음료를 여러 형태의 유리병 모양에 담아 제공할 수 있다. 3D 프린트 단추를 누르면 판매기가 다양한 형태의 유리병을 출력한 뒤, 그 안에 원하는 주스를 담는다. 먼 훗날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같다. 미국의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에는, 취향에 맞는 플라스틱물품을 프린트해주는 자판기가 있다. 원리상으론 플라스틱을 유리로만 바꾸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MIT 연구진은 기술과 예술을 융합한 3D 프린팅 유리제품을 2016년에 열리는 뉴욕 쿠퍼 휴이트 미술관 전시회에 출품해 작품성을 평가받을 예정이다.
곽노필 기자 nopil@hani.co.kr
[출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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